21.2.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프로코피예프가 스탈린의 강철 같은 산업화와 전쟁의 포화를 충성스럽게 피아노로 그려냈다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는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고뇌하는 개인의 내면을 피아노를 통해 은밀하게 표현함.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Op. 87는 바흐에 대한 헌사이자, 20세기 피아노 음악이 도달한 가장 지적이고 깊이 있는 작품 중 하나임.
1950년 라이프치히와 바흐의 재발견
1950년, 쇼스타코비치는 바흐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는 독일 라이프치히 바흐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함. 여기서 그는 우승자인 소련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Tatiana Nikolayeva)가 연주하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음.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바흐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담아내기로 결심하고, 단 4개월 만에 24개의 조성 모두를 사용하는 대작을 완성함.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의 연주자에게 요구한 것
타건이 아닌 보이싱(Voicing)
이 작품은 프로코피예프처럼 손가락의 물리적인 힘이나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곡이 아님. 연주자에게 요구되는 주 역량은 바로 *다성 음악(Polyphony)의 이해와 소리의 분리임.
수평적 듣기
화음을 수직적으로 쾅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3개에서 4, 5개에 이르는 각 성부(Voice)가 독립적인 선율로서 노래하도록 만들어야 함. 연주자는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왼손과 오른손의 열 손가락을 각기 다른 악기처럼 다룰 수 있어야 함.
음색의 절제
낭만주의적인 과장된 루바토나 감상적인 터치는 배제됨. 바흐처럼 엄격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되, 그 이면에 숨겨진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비애와 고통,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기괴한 유머를 미묘한 음색의 변화로 표현해야 함.
주요 곡의 특징
제1번 C장조
바흐의 평균율 1권 1번을 연상시키는 맑고 투명한 사라방드 풍의 전주곡으로 시작하여, 오음계(Pentatonic)적인 주제를 가진 순수한 푸가로 이어짐. ‘흰색’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곡.
제15번 D♭장조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불안함이 극대화된 곡. 왈츠풍의 전주곡에 이어지는 푸가는 무려 11개의 반음계 음을 사용하는 난해하고 공격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어, ‘조성 음악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느낌을 줌.
제24번 D단조
전체 사이클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거대한 작품. 두 개의 주제를 가진 이중 푸가(Double Fugue) 형식을 취하며, 마치 교향곡을 피아노로 옮겨놓은 듯한 웅장함과 비극적인 분위기를 보여줌. 마지막에 D단조와 D장조가 섞이며 끝나는 결말은 억압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인간 정신의 승리, 혹은 풀리지 않는 영원한 질문처럼 들림.
쇼스타코비치의 24개의 전주곡과 푸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요하는 알기 쉬운 선동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음. 이는 작곡가가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나누는 바로크와의 교감이며, 시대를 견뎌내기 위한 정신적인 망명이었음. 피아니스트에게 이 곡은 단순한 연주가 아닌, 고도의 지적 성찰과 명상을 요구하는 성역과도 같은 작품임.
Shostakovich: 24 Preludes & Fugues, Op. 87:
No. 24 in D Minor
피아노 :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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