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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그래픽 기보와 악보

Open Music Theory 한글판 · dcinside digital piano gallery


오선·음표·쉼표가 보이지 않는다고 악보가 아닌 것은 아님. 소리의 길이, 높이, 음색, 연주 순서, 연주자가 고를 수 있는 범위를 전달한다면 선·색·도형·말도 기보가 될 수 있음. 이런 표기를 그래픽 기보라고 함. 서양 전통 기보처럼 읽는 법이 촘촘히 정해져 있지 않아서, 작곡가가 무엇을 열어 두었는지와 연주자가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를 먼저 가려야 함.

원문은 그래픽 기보를 ‘전통 기보보다 덜 정확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음. 필요한 정보를 다른 방식으로 나누는 기보임. 악보에 규칙이 적을수록 연주자의 판단은 커지지만, 그 판단에도 작품의 재료·지시·맥락이 근거가 되어야 함.

눈으로 들려주는 음악에서 출발함

섹션 제목: “눈으로 들려주는 음악에서 출발함”

20세기에 그래픽 기보가 크게 퍼졌지만, 시각적 상징을 악보에 넣은 일은 르네상스까지 거슬러 올라감. 독일어 아우겐무지크(Augenmusik, 눈의 음악)는 보통 오선 기보를 그대로 쓰되, 오선이나 음표 배열을 그림으로 바꾸어 상징을 보탬. Baude Cordier의 15세기 롱도 〈Belle, Bonne, Sage〉는 사랑 노래를 하트 모양 악보로 적은 대표적인 예임. 모양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눈으로도 보여 주지만, 소리 자체를 바꾸지는 않음.

〈Belle, Bonne, Sage〉 하트 모양 원전 악보 보기

20세기에는 전통 기보만으로 담기 어려운 리듬·발성·음색을 적으려는 요구가 커짐. Schoenberg가 슈프레히슈티메에 X자 음표머리를 쓴 것도 이 흐름 안에 있음. Henry Cowell은 《New Musical Resources》(1930)에서 복잡한 분할을 적을 새 음표머리를 제안했고, 1922년 〈Fabric〉에서 사각형은 한 마디의 아홉 등분, 삼각형은 한 박의 세 등분, 마름모는 한 마디의 일곱 등분을 뜻하게 했음. 눈에 보이는 모양이 박의 분할을 직접 말하는 경우임.

Cowell 〈Fabric〉 10~12마디 원문 악보 보기

Morton Feldman의 〈Projection 1〉(1950)은 더 멀리 나아감. 첼로 독주를 위한 이 작품에는 보통의 오선 기보가 없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고 각 칸은 대략 4분음표=72에서 네 박의 시간을 차지함. 연주자는 하모닉스·피치카토·아르코 중 음색을 고르고, 높은·중간·낮은 세 음역 안에서 음높이를 고름. 작곡가는 시간과 음역·음색의 틀을 잡고, 음의 선택은 연주자에게 넘긴 셈임.

불확정성(indeterminacy)은 작품의 일부를 우연이나 연주자의 선택에 맡기는 작곡 태도임. 주사위·동전처럼 우연 절차를 쓰는 음악도 여기에 들어가고, 즉흥의 폭을 열어 두는 일도 여기에 들어감. 같은 악보를 연주해도 공연마다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보통의 전통 기보 연주와 다름.

John Cage는 이 생각을 작곡과 기보의 중심으로 밀어 넣었음. 〈4′33″〉은 어떤 편성·몇 명의 연주자도 연주할 수 있고, 세 악장 동안 연주자가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지시임. 총 4분 33초는 같아도 공연장 안의 기침·호흡·의자 소리, 야외의 바람과 자동차 소리는 매번 달라짐. ‘침묵’을 재현하는 곡이 아니라, 연주가 벌어지는 장소의 소리를 듣게 하는 작품으로 보면 됨.

지시가 거의 없는 악보에서는 한 가지 정답을 찾는 태도부터 내려놓아야 함. 색·선의 굵기·밀도·방향·면적·반복, 빈 공간, 적힌 단어가 어떤 소리와 시간 감각을 부를지 따져 보고 연주 방침을 세움. 시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지, 위에서 아래로 갈지, 혹은 여러 연주자가 서로 다른 경로를 택할지도 결정해야 함. 음높이·리듬·셈여림·아티큘레이션·음색도 같은 식으로 풀어야 함.

Henrik Colding-Jørgensen의 〈Museik No. 10〉(1979)은 자유 시간의 좋은 사례임. 몇 명이 연주하는지 정하지 않았고, 색색의 도형과 선이 악보를 채움. 어느 방향으로 읽을지, 색과 모양을 서로 연결할지조차 열어 두었음. 그래서 연주자는 ‘이 모양을 이렇게 읽겠다’는 논리를 세워야 하고, 다른 연주가 나와도 원칙이 작품과 맞닿아 있으면 그만큼 유효함.

〈Museik No. 10〉 원문 악보 보기

Kyong Mee Choi의 〈Conceptual View of Worlds I〉(2002)는 피아노·첼로·클라리넷·트럼펫·베이스드럼이라는 편성을 정하고, 오선·음자리표·셈여림과 추상 선·도형을 섞음. 이런 악보를 혼합 기보(hybrid score)라고 함. 각 성부의 가로 공간을 초 단위로 나누되 3초·6초처럼 고르지 않게 묶어, 일정한 박자감 대신 시간의 결을 만든다는 점도 함께 볼 수 있음.

작곡가가 연주 방법을 적었다면 그 지시가 우선임. 지시가 자세할수록 연주자의 선택은 줄어들고, 넓게 적힐수록 선택의 자리가 남음. Dimitris Maronidis의 〈Constellation〉(2002)은 지휘자가 전체 소리의 밀도·강도·공간 이동을 정하고, 연주자는 지휘 신호에 따라 하나의 자유 모티브를 즉흥함. 모든 즉흥구는 F♯으로 돌아오고, 끝에서는 아주 큰 C장조 화음이 20초 동안 사라진 뒤 오케스트라가 약 15초 정지함. 그래픽만 보고 자유롭게 해석하는 곡이 아니라, 이 약속을 실현하는 곡임.

Julien Monette의 피아노와 고정 매체를 위한 〈Ballade〉(2024)는 연주자에게 스톱워치를 켜고 고정 매체와 시간을 맞추라고 지시함. 11개 구역마다 글로 된 연주 지시가 붙고, 악보 아래에는 4초마다 나뉜 시간선이 있음. 어떤 구역은 음·옥타브·길이만 고를 수 있고, 어떤 구역은 선을 바탕으로 느린 선율·반주·화성·질감까지 스스로 만들어야 함. 지시의 구체성이 달라지면 불확정성의 폭도 달라짐.

Malcolm Goldstein의 〈Jade Mountain Soundings〉(1983)은 활 긋는 현악기 하나를 위한 곡임. 연주 전 음 네 개를 정하고, 선의 두께는 활 압력·활 속도, 선의 곡률은 활의 위치 변화를 가리킴. 로마 숫자는 어느 줄을 쓸지 알려 주고, 선을 따라가다가 다음 숫자에 닿으면 활 방향과 음을 바꿈. 한 선을 어느 쪽에서 시작할지, 음과 셈여림을 어떻게 고를지는 열려 있지만, 선을 숨처럼 긴 프레이즈로 만들라는 작곡가의 요구는 분명함.

그래픽 기보는 마디선과 박자표 대신 초로 시간을 잴 수 있음. 시간선 기보(timeline notation)에서는 초를 같은 간격으로 나눌 수도, 3초·6초처럼 다른 간격으로 나눌 수도 있음. Monette의 〈Ballade〉는 4초 단위의 균등한 격자를 쓰고, Choi의 작품은 고르지 않은 초 묶음을 써서 비박처럼 들리게 함. 반대로 〈Museik No. 10〉처럼 시간의 진행을 전혀 알려 주지 않으면 자유 시간임.

Maxwell Tfirn의 〈Unstable Revolutions〉(2019)은 오선·음자리표·음표머리와 컴퓨터 파트를 나타내는 선을 함께 쓴 혼합 기보임. 3′24″–3′29″는 5초, 3′29″–3′37″은 8초처럼 시간 간격도 균일하지 않음. 기보를 읽을 때 전통 기호만, 그래픽만 따로 읽지 말고 두 체계가 같은 순간에 어떤 역할을 맡는지 함께 들어야 함.

그래픽 기보를 연습할 때는 먼저 악보에서 보이는 사실과 해석을 분리해 적어 보기 바람. ‘굵은 검은 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짐’은 사실이고, ‘낮고 거친 소리로 길게 연주하겠다’는 해석임. 그 뒤 시간·음높이·리듬·음색·연주 경로에 관한 결정을 하나씩 말로 적으면, 자유로운 해석도 막연한 즉흥이 아니라 근거를 가진 연주가 됨.

원문: Graphic Notation and Scores
그래픽 기보의 역사·불확정성·연주 해석·시간선과 혼합 기보를 악보 이미지와 영상으로 다루는 Open Music Theory 원문.
https://viva.pressbooks.pub/openmusictheory/chapter/graphic-notation-and-sco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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