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들의 수입 (클라라 슈만 2)
작곡가들의 수입 (클라라 슈만 1) - 디지털 피아노 마이너 갤러리
1부에서 이어짐.
브람스가 54세 때인 1887년 10월, 클라라에게 내가 보낸 편지를 돌려달라고 요청했고, 클라라는 며칠을 망설이다가 대부분의 편지를돌려줌.
브람스는 라인강을 오가는 증기선에 타고 배 위에서 편지들을 강물 속으로 던져버림.
이 내용은 클라라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
나는 그의 편지들을 다시 읽으며 내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을 추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았기에, 눈물을 머금고 그에게 편지들을 돌려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클라라의 맏딸 마리가 어머니 옆에서 이 과정을 지켜봤고, 훗날 전기 작가들에게 이 사실을 증언한 사실임.
남편이 죽은 1856년 이후, 클라라는 총 1,300회 이상 공연을 했는데, 이 중 런던을 가장 많이 갔다고 함.
나이가 들어 마차를 타고 다니는 투어가 힘들어지자, 그녀는 1878년(59세)에 정착을 결심하고 프랑크푸르트 호흐 음악원의 교수로 취임함.
재직 조건음 연봉 2,000 마르크와 개인 레슨비과 연주 투어의 자유 보장이었고, 집에서 편하게 가르치고 싶다고 하니, 학교 측에서 클라라 집으로 학생들을 보내주기도 함.
(이제부터 화폐단위가 탈러에서 마르크로 바뀜)
클라라는 유일한 여성이자, 학교 내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여성 교수였음.
클라라는 연주 투어에서 베토벤과 바흐, 모차르트를 주력 레퍼토리로 구성했고, 2부 중간에 슈만 곡 하나를 연주하고는 마지막에는 화려한 쇼팽이나 멘델스존으로 마무리했다고 함.
주력 레퍼토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였고 특히 함머클라비어 등의 후기 소나타를 잘 쳤다고 함.
결혼 초반에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피아노 협주곡, 변주곡 등)도 자주 연주했지만, 결혼 생활과 육아, 연주 활동, 여성의 창작을 곱지 않게 보던 당시의 사회적 통념이 겹치면서 작곡 비중이 크게 줄었음. 이후에는 남편의 작품을 연주하고 편집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음.
클라라가 1896년 사망했을 때 남긴 유산은 약 100,000 마르크가 넘는데, 당시 독일은 연봉 3,000 마르크가 넘으면 부르주아로 분류해 훗날 생긴 사회보험 가입조차 불가능한 부자로 분류됨.
그래서 슈만의 정신병원 입원과 치료비, 아이들의 양육비까지 고소득자인 클라라는 그 어떤 사회적 지원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손가락 노동으로 번 생돈으로 감당해야 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33년을 한 푼도 안 쓰고 숨만 쉬며 모아야 하는 거액의 유산을 남기고 떠남.
남편이 남긴 건 빚과 아이 7명뿐이었지만, 클라라는 그 빚을 다 갚고, 아이들을 유학까지 보내고도, 강남 아파트 몇 채 값에 달하는 현금을 남긴 것임.
클라라 슈만은 단순히 슈만의 곡을 세상에 알린 내조자가 아니라, 파산 위기에 처했던 슈만 가문을 자신의 재능과 노동으로 먹여살린 가장이었음.
Clara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7
클라라가 13~15살에 작곡하고, 멘델스존의 지휘로 직접 초연했던 곡. 2악장에서 피아노와 첼로가 주고받는 부분이 정말 좋음.
(7:29초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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