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들의 수입 (클라라 슈만 1)
결혼 직전, 클라라는 아버지와 함께 비엔나로 투어를 떠나 총 19번의 콘서트를 열고 전석 매진을 기록함.
또,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황실 궁정 연주자라는 칭호를 받음. 외국인으로서, 그것도 10대 여성이 이 칭호를 받은 건 최초였음.
이후 슈만과 결혼문제로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혼자서 떠난 파리 투어(1839년)에서도 단기간동안 레슨과 연주회로 큰 수익을 올림.
당시 슈만과 클라라는 아버지를 상대로 소송중이었는데, 결혼반대에 대한 소 뿐 아니라 그동안 아버지가 착복한 내 돈을 돌려달라는 소송이었음.
클라라는 소송에서 부친이 없어도 충분히 신혼 살림을 차릴 능력이 된다는 것을 파리투어 정산금으로 증명하고, 7년 동안 번 공연 수익금을 돌려달라고 주장함.
이에 대해 아버지는 양육과 교육 그리고 피아노 보관료와 생활비로 다 쓰고, 오히려 1,000 탈러가 더 들었다고 주장함.
법원은 아버지 비크에게 딸이 벌어놓은 자본금 2,000 탈러에 이자 5%를 더해 반환하라고 명령함.
클라라의 아버지는 슈만이 무능력(연간 400탈러의 수입)하고,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고 소송까지 갔지만, 사실은 클라라가 벌어오는 공연 수익을 놓치기 싫어서, 반대한 것이었음.
클라라는 파리 투어에서 번 300탈러와 아버지에게 정산받은 2100탈러로 라이프치히의 고급 아파트(인젤슈트라세 5번지)의 2층을 모두 빌리고, 고급 가구와 요리사, 하녀까지 고용해서 신혼을 시작함. 거실 공간만 그랜드 피아노를 두대 놓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니 대단히 풍족한 시작이었음.
이후 신혼부터 클라라가 사망할 때까지 수입과 지출을 수기로 기록한 가계부가 독일 츠비카우에 있는 슈만 생가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고,
Robert Schumann Tagebücher, Bd. 3 Haushaltsbücher 1837-1856 Leipzig, Deutscher Verlag für Musik
위 링크에 디지털로 가계부의 인쇄본을 볼 수 있음.
가계부를 보면, 클라라가 만삭일 때도 마차와 배를 타고 공연을 다니며 번 돈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고, 일이 떨어져 놀고 있던 슈만은 시가와 와인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알 수 있음.
클라라의 가장 큰 수입원은 연주 투어였는데, 결혼 후 가장 적게 벌어 온 투어가 1,000 탈러였고, 1844년 러시아 투어에선 6,000 탈러를 벌어옴.
투어가 없을 때는 비엔나나 베를린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고,러시아 황제나 영국 여왕에게 받은 보석이나 금화를 현금화한 기록도 있음.
1844년의 가계부를 보면 슈만의 수입은 0이고 클라라 수입은 5,942 탈러였음.
슈만의 편지나 일기를 보면, 아내 덕분에 산다. 나는 가장으로서 무능하다는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 그럼에도 아내의 승승장구를 질투해 자신이 작곡에 집중해야 한다며 클라라에게 피아노 연습을 하지말라고 자주 화를 냈다고 함.
클라라의 일기엔 “내 피아노 실력은 점점 퇴보하고 있다. 로베르트가 작곡할 때는 나는 한 음도 칠 수 없다. 나도 연습이 필요한데..“ 라는 한탄도 자주나옴.
클라라는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쉬지 않고 연주 투어를 했는데, 이것은 집에 남아있는 7명의 아이를 브람스가 무상으로 돌봐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
슈만의 병원비가 엄청나게 비쌌는데, 브람스가 이 복잡한 병원비 정산과 가계부 관리까지 도맡아 처리해 줌. 브람스는 슈만을 우상처럼 대했고, 그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고 여겨 헌신함.
나중에 슈만이 죽고 브람스가 헝가리 무곡으로 대박을 쳤을 때, 클라라에게 재산을 관리해주겠다고 나서며 은행이자와 주식으로 크게 수익을 낸 것처럼 꾸며 클라라에게 지속적으로 거액을 건냄.
그 둘의 편지를 보면 브람스가 클라라의 집을 다녀간 날엔 항상 금화를 집안 여기저기 흩뿌려놓고 간 사실도 알 수 있음. 클라라가 금화의 출처를 물으면 브람스는 거기 원래 있던데요 라는 대답을 함.
이런 아낌없는 도움에 대해 음악사 학자들은 플라토닉이었다고 하는데,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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