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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들의 수입 (베토벤)

작곡가들의 수입 (베토벤) 이미지 1

나의 영웅, 나의 프로메테우스

Sinfonia grande Bonaparte

(보나파르트 대(大) 교향곡)

- Louis van Beethoven -

프랑스 혁명 직후, 베토벤은 나폴레옹(당시 제1통령)이 부패한 왕정과 귀족들을 갈아엎고, 자유와 평등의 공화국을 건설할 영웅이라고 생각함.

그래서 보나파르트 대(大) 교향곡을 작곡하고, 나폴레옹에게 헌정 한 후 프랑스에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었음.

작곡가들의 수입 (베토벤) 이미지 2

그래서 원본 표지의 작곡가 이름도 미리 프랑스식으로 Louis van Beethoven으로 기재함.

그런데,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자 베토벤은 대격분해 악보 표지를 펜으로 도려내고 제목을 영웅(Eroica)으로 바꿈.

🔗 The history of Beethoven’s Third Symphony (Eroica) – Popular Beethoven
https://www.popularbeethoven.com/the-history-of-beethovens-third-symphony-eroica/

진짜 문제는 1805년, 1809년 두 차례에 걸친 전쟁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오스트리아는 전쟁하느라 돈을 너무 많이 찍어내서 초인플레이션이 오고, 재정 칙령을 내려 오스트리아 화폐의 가치를 1/5로 평가절하함.

베토벤은 킨스키, 롭코비츠, 루돌프 대공에게 매년 총 4,000굴덴을 연금으로 받기로 계약이 되어있었는데, 이 칙령으로 수입이 1/5로 줄어버림.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거지나 다름없다!”라고 화를 내고, 죽은 후원자의 유족을 상대로 수십차례의 소송을 함. 매년 총 4,000굴덴을 주기로 했으니 절하된 지폐 말고 은화로 달라는 내용이었음.

게다가, 프랑스군의 포격 소리가 베토벤을 심각하게 괴롭힘. 베토벤은 남은 청력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동생의 집 지하실로 숨어 베개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 있었음.

이 당시 작곡한 곡이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인데, 부제를 베토벤이 붙인 것은 아님.

피아노 소나타 26번 Les Adieux (고별)도 이 당시에 쓴 곡으로 후원자인 루돌프 대공이 나폴레옹을 피해 피난을 가자, 슬퍼하며 쓴 곡임.

1813년, 영국의 아서 웰슬리 웰링턴 공작이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자 베토벤은 웰링턴의 승리 (Wellington’s Victory)를 작곡해 무대에 올림.

이 곡은 전쟁 교향곡이라고도 불리는데, 정말 베토벤이 작곡 한 게 맞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졸작임.

하지만, 1813년 12월과 1814년 초, 비엔나에서 열린 초연과 앵콜 공연들은 그야말로 대박이 남.

이때 벌어들인 돈이 3,000 ~ 4,000굴덴이었고, 악보를 영국 황실에 보내주고 받은 돈은 1,000 파운드였음.

1,000파운드는 오스트리아 화폐로 약 10,000굴덴이지만, 이것이 종이가 아니라 은화였기 때문에 이보다 2.5배 많은 25,000굴덴으로 환산 됨.(전쟁이 끝나서 오스트리아의 화폐 가치가 다소 상승함.)

🔗 Beethoven: Wellington’s Victory – Popular Beethoven
https://www.popularbeethoven.com/beethoven-wellingtons-victory/

베토벤은 이 곡 하나로 영국 왕실과 출판사,필하모닉 협회 등에서 수익을 냈고, 베토벤이 단일 곡으로 번 액수 중 가장 큰 금액이었음.(하이든이 남긴 유산의 1/2수준)

전쟁교향곡 초연 날 교향곡 7번도 함께 초연했는데, 전쟁교향곡에는 미친 듯이 열광하며 앵콜을 외쳤지만 교향곡 7번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고함.

베토벤이 곡으로 큰 돈을 번 사실을 알자 친구인 맬첼(메트로놈 돚거 발명자)가 ‘그 곡의 아이디어는 내가 낸 거니 수익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소송을 함.

사실 멜첼이 개발중이던 자동 연주 기계(판하르모니콘)에 넣을 곡으로 부탁했던 걸 작곡도중 영국이 이기자 베토벤이 교향곡으로 바꾸어 완성한 것임.

어쨌든 이 소송은 화해로 끝났지만 둘은 원수지간이 됨.

베토벤은 평생을 아무 귀족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작곡한 인세로만 생활했는데, 앞서 말한 루돌프 대공, 킨스키 공작, 롭코비츠 공작 3명이 비엔나를 떠나지 않는 조건으로 매년 4,000 굴덴을 주기로 한 것이 유일한 고정 수입이었음.

그래서 추가 수입에 항상 목말라했고, 같은 곡을 여러 나라에 동시에 팔거나 미사 솔렘니스 경매에 곡을 내놓고 경매를 붙여 욕을 먹기도 함.

또한 죽기 직전에도 돈이 없어서 땔감을 못 산다며 런던 필하모닉 협회에 편지를 보내 100파운드(은화)를 지원받기도 함.

하지만, 1827년 사망하고 책상 서랍에서 오스트리아 국립은행 주식 7주가 발견되었는데, 이 주식과 몇가지 유산을 정리하니 은화로 10,235굴덴이었고 이중엔 런던 필하모닉이 보낸 100파운드도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함.

이 돈은 당시 오스트리아 화폐로 약 25,000굴덴의 가치였음. 당시 일반 교사의 연봉이 60~150굴덴이었으니 매우 큰 돈이었고 이 돈은 모두 베토벤이 사랑하던 양자(조카) 카를에게 상속됨.

그리고, 전쟁 교향곡으로 가장 많은 돈을 벌긴 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내가 쓴 곡 중에 제일 쓰레기 같은 곡을 저 바보들이 제일 좋아하네.”라고 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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